tv 드라마로 바람의 화원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었었다. 하지만 난 보지 않았다. 뭐 tv에 붙어있지는 않는 스타일이라서.... ㅡ.ㅡ;; 그리고 미인도라는 영화도 그 즈음 개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별 관심없는 영화였다. 어차피 노출을 미끼로 한 영화 같기에...
그런데 서점에서 이 책을 대충 펼쳐보니 익숙한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이 대거 실려있었다. 뭐 아직도 어린아이의 치기가 남아서인지 그림 많은 책은 (일명 그림책) 왠지 읽고 싶어진다.... ^^ 그래서 선택한 책이다....
역시나 단골인 영주 도립 도서관에서 냉큼 대여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 뭐 그리 부담되는 양은 아니지만 신생아를 둔 관계로 다소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아무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영화와 드라마처럼 남장여인의 컨셉은 같고...앗 이건 스포일러성이다.. 그래서 암호처리하공.....
우선 천연화보로 크게 실려 있는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단원과 혜원의 그림을 서로 비교하며 스토리를 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빠져드는 재미가 있었으며 그 전에 그냥 대충 봤던 그림들을 이야기 중에 자세한 해석과 더불어 보면서 그림을 읽는 재미까지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마지막에 씨름과 쌍검대무에서는 다빈치 코드처럼 암호 풀이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두 천재화가의 그림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감정의 흐름을 가지고 도화서라는 획일화된 양식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억압받으면서 생기는 갈등들을 그리고 있으며 정향이라는 여인과 정조 임금까지 그 인간 관계 속에 얽혀 들어간다. 또한 10년 전의 두 화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푸는 스릴러의 구조까지 안고 있다. 어진화사라든지 다소 생소한 낱말도 등장하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 하지만 한가지 언급할 것은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책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일단 책의 표지가 비슷하게도 빨간 색이다. ㅋㅋ
그리고 주요 소재 중 하나가 그림이라는 점, 그리고 임금이 연관이 되어 있으며 국가적인 그림 기관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하나 중요한 건 둘 다 그 국가적인 기관의 기존의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화풍을 개혁하려는 점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둘 다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혜원 신윤복 쌍검대무
단원 김홍도 씨름
끝으로 마음에 들었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그림이 그리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리움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시간은 사건을 희석시키고, 진실을 풍화시켰다.
기록된 거짓이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지워버린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그 기억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겠고, 어딘가를 가야 한다면 그 기억의 끝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 같은 피곤함
농현
화원은 그림을 그릴 뿐이지만 시간은 그림을 완성시켰다.
화원이 그리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아니올지요.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은 화원이 본 것이 아니라 대상의 형태를 빌어 표현된 화원 자신의 꿈과 욕망과 희노애락일 것입니다.
가지 끝에서 오래오래 농익은 과일 한 알이 떨어지듯, 윤복은 홍도의 가슴 위로 툭 떨어졌다. 오래오래 열매를 기다리던 땅은 그 무게를 아프게 느꼈다.
널 내 곁에 잡아두는 건 나를 위한 일이지만, 널 이곳에서 떠나보내는 것이 진정 널 위한 일이란 걸 알겠다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기다린다고 빨리 가지 않으며,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 시간이니까.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 화인의 눈을 통해 비치는 상을 그리는 것일 뿐이니 그 또한 그림자가 아닙니까?
화인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사람이다. 비치는 상이 아니라 그 실체를 말이다.
실체를 그릴 수 있는 화인은 없습니다. 단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비친 상을 종이에 옮길 뿐이지요. 화인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실체는 그리고자 하는 화인의 욕망에 투영된 그림자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 화인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를 그리려 해도 그것은 이미 실체가 아닙니다.
화인이 그리는 것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된 대상일 뿐입니다.
왜곡된 형상 또한 실체의 한 변형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형상을 쫓으면 실체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은 정의로울지 모르지만 늘 옳은 것은 아니었다.
알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알아버린다면 아름다움도 가뭇없이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 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 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